미래를 디자인하기

왜 우리는 사변(思辨)해야 하는가

베풀:장 2024. 7. 19. 00:23

이전 글에서 언급했듯이, 디자인은 공예로부터 출발하였다고 여겨집니다. 디자인에게 주어진 첫 역할은 기능과 형태가 거의 완성된 디자인 대상물에 심미적인 요소를 더하여 상품성을 더 올리는 것이었는데, 이로 인해 디자인은 '제작 과정에서 장식을 더해 더 높은 값으로 판매하려 하는' 일종의 상술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당시 기준으로는 그렇게 볼 수도 있었겠지만, 이것은 오래된 오해일 뿐입니다.

 

디자인의 역할과 개념이 더 발전하면서 디자인은 공정의 초기 단계로 점차 옮겨 참여하게 되었는데, '기능과 형태를 어떻게 정할지' 고민하는 역할로 그 지위가 점차 바뀌게 된 것입니다. 이는 소비자들이 점차 상품 구매 결정에 심미성을 중요하게 반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는데, 그렇게 보다 결정권을 가지기 시작한 디자인은 오히려 불필요한 요소를 제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미적인 완성도를 위한 과정으로, 우리 인간은 사실 그렇게 복잡한 정보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잡함, 지저분함 등은 우리에게 미적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디자인은 심미적인 구성 전문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더 좋은 디자인일 수록) 상품성을 높이는 더 효율적인 방향을 제시해 왔습니다. 

 

이 상태가 상당히 지속된 이후의 디자인은 점차 여러 가지 분야로 확장해나가기 시작하는데, 이는 다음 글에서 다룰 디자인의 범용성과도 연관이 있지만, 어느 정도 심미적인 작업이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즉, 많은 디자인 대상에 대해 이미 충분히 덜어낸 효율적 형태가 제시되면서, 어느 순간 형태적인 차별성은 없어지고 상향평준화 되었습니다. 또, 산업에서의 요구는 다양하고 이해관계자가 복잡한 상태에서 심미적인 구성만으로 모든 수요가 해결되지 않는 한계도 있었습니다.

 

The Evolution and growing complexity within design fields. (Beaulé, Caoimhe Isha. (2018). Design as a Strategic Tool for Sustainability in Northern and Arctic Contexts: Case Study of the Arctic Design Concept in Finland.)

 

 

위의 그림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디자인의 영역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여주는 도식입니다. 디자인은 점차 시지각적인 영역을 벗어나 다양한 분야와 결합되면서 새로운 형태로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대표적으로 유명한 사용자 경험 디자인(User eXperience Design)은 전통적인 시각에서 보면 무슨 디자인이냐 싶을 정도로 어떤 측면에서는 반(反) 심미적이기까지 합니다. 이는 분명 디자인이라는 개념과 업계가 더 확장되고 발전해가는 것이고, 성숙해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디자인이 보다 객관화된 토대에서 제 목소리를 내고, 과학적인 접근과 해결책을 가지는 방향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분명 디자인의 뿌리는 더 뻗어가고 줄기는 더 튼튼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보면  미적인 구성 전문가로서의 정체성이 구시대의 제한적인 이해에서 비롯된 낡은 유물처럼 여겨질 수도 있지만, 사실 디자인이라는 분야가 타 분야와 차별화되는 비교적 튼튼한 울타리로서의 역할도 해 왔습니다. 그 울타리를 벗어남은 외연적 확장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강한 정체성 혼란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컴퓨터 기반의 그래픽 기술 발전은 이러한 움직임을 가속하고 있습니다. 미적인 구성 전문가로서 해오던 일들을 많은 컴퓨팅 기반 도구들이 대신하면서, 디자인을 감싸는 울타리는 더 낮아지고 혼란은 더 가중되고 있습니다. 펜을 놓는 시간이 늘어난 만큼 더 많은 고민의 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디자이너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디자인이 맞는 지 의구심을 표해왔습니다. 그리고 그 고민은 인공지능 서비스가 본격화되기 시작하면서 고조되는 분위기입니다.

인공지능 서비스가 디자이너의 미래를 빼앗아 가지 않을까?

 
인공지능 서비스의 등장으로 극적으로 디자인이라는 직업과 개념이 결국 없어지거나 도태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많지만, 사실 큰 맥락에서는 거대한 변화의 방향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아 보입니다. 디자이너가 펜을 놓는 시간은 계속해서 길어지고 있었고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이전부터 계속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결국 디자인 업계가 오랫동안 쌓아온 디자인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시지각 전문가로서의 외연을 걷어낸 그 내실에는 무엇이 자리잡고 있는가, 하는 것이 앞으로의 디자인이 나아갈 방향이자, 중요한 차별점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전 글을 통해서도 이야기했듯이, 디자인은 크건 작건 간에 언제나 선제적으로 디자인 대상을 다루고 그 효과를 예상하여 바라봐 왔습니다. 디자인 대상이 포스터이던, 제품이던, 건축물이던 그 제작 과정과 제작 이후의 사용 환경에 대해 예견하고 그 예견을 토대로 디자인 형태의 제안에 대한 근거를 제시해왔습니다.

 

수많은 디자인 공모전에 출품되는 컨셉디자인 (Conceptual design) 제품들 또한 이러한 점을 방증하는데, 거의 발명에 가까운 디자인들이 디자인 공모전에 쏟아져 나오는 이유 역시도 디자인을 얽어맨 여러 가지 고삐를 풀어놓으면 자연스럽게 향하는 방향이 기술과 환경, 사용자의 조화를 통해 미래를 예측하는 방향으로 이어지는데 있을 것입니다.

 

이를 정리하면 본질에 대한 선행적 생각 즉, 사변(思辨)입니다. 사변이라는 말은 [생각할 사]와 [가려낼 변]을 씁니다. 이 둘이 합쳐지면 생각하고 가려낸다는 말로 철학적인 용어로는 '경험이 아닌 논리적 사고를 통해 현실을 인식함'을 의미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디자인은 창의적'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적인 인식도 디자인의 '미래 예측적 성격'에서 비롯한다.

 
즉, 디자인이 사변적인 방향으로 향하는 것은 어떤 새로운 개념이 디자인으로 유입되어서가 아니라 외연적으로 디자인을 정의하던 '심미적 구성 기술자'로서의 성격이 옅어지는 가운데 그 내부에 있던 '사변적 선도자'로서의 본질이 드러나보이는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보입니다. 디자인의 본질, 변화해온 역사, 시대적 배경 등을 종합하여 내려지는 당연한 결론으로서 말입니다.
 

 
디자인의 끝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같이 융합된 형태의 순수학문이 되어야 할 지도 모릅니다. 인류의 존속과 번영이라는 목적을 두고 우리가 가진 기술과 자원을 효율적으로 재배치하는 과정에서 다원화 (divergence)되어 온 학문을 하나로 합치고 통합적으로 지휘하여 이끄는 일원화 (convergence)된 학문으로서 기능하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디자이너들에게는, 이제 생각할 시간이 오고 있습니다.

 

이 역시 하나의 사변적 (스페큘러티브; Speculative) 디자인으로서, 디자인이 가진 가능성 중 선호되는 미래(Prefered future)를 제안하는 대안적 미래로 여겨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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