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is Speculative Design2편

답 대신 질문을 만드는 디자인

스페큘러티브 디자인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1990년대 비판적 디자인과 던 & 라비의 A/B 선언을 따라가며, 문제 해결이라는 디자인의 전제를 왜 의심하게 되었는지 살펴봅니다.

앞선 글에서 스페큘러티브 디자인을 ‘사회와 시대 전반을 목적물로 두고 더 나은 길을 상상하고 제안하는 디자인’으로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이 개념이 처음부터 그런 큰 포부를 품고 등장한 것은 아닙니다. 출발점에는 그보다 훨씬 까칠한 질문이 있었는데요, 바로 ‘디자인은 정말 문제를 해결하기만 하면 되는가’라는 물음입니다.

디자이너에게 문제 해결은 거의 정체성에 가까운 말입니다. 불편을 찾아내고, 원인을 분석하고, 더 나은 형태를 제안합니다. 저 역시 이 시리즈 바깥의 글에서 UX디자인을 그런 관점으로 이야기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 틀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전제가 하나 숨어 있습니다. 문제가 이미 올바르게 정의되어 있고, 지금의 세계가 그 해결책을 받아들일 만한 전제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믿음이지요.

전자제품을 의심한 디자이너들

이 전제에 정면으로 질문을 던진 사람들이 영국의 앤서니 던(Anthony Dunne)과 피오나 라비(Fiona Raby)입니다. 이들은 1990년대 중반부터 ‘비판적 디자인(Critical Design)‘이라는 개념을 다듬어 왔고, 던은 1999년 『Hertzian Tales』에서 전자제품을 미학적 경험과 비판의 대상으로 다루었습니다.

여기서 ‘비판적’이라는 말은 흠을 잡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제품이 은연중에 전제하는 생활 방식과 가치를 드러내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쓰는 전자제품은 단지 기능을 수행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까지 함께 실어 나르기 때문입니다.

그 뿌리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70년대 이탈리아의 래디컬 디자인과 안티 디자인을 만나게 됩니다. 에토레 소트사스(Ettore Sottsass)의 1973년 작업 〈The Planet as a Festival〉이 그 앞선 시도로 자주 언급되는데요, 당장 만들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다른 세계의 상을 그려 보이는 일 역시 디자인이 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입니다.

A/B, 두 개의 목록

이 생각을 가장 간결하게 정리한 것이 던과 라비의 ‘A/B’라는 목록입니다. 2013년에 낸 『Speculative Everything』의 서문에서도 이 책이 그 목록에서 출발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왼쪽 A에는 익숙한 디자인을, 오른쪽 B에는 그들이 제안하는 디자인을 나란히 놓는 형식입니다.

AB
긍정적(Affirmative)비판적(Critical)
문제 해결(Problem solving)문제 발견(Problem finding)
답을 제공한다(Provides answers)질문을 던진다(Asks questions)
생산을 위한 디자인(Design for production)토론을 위한 디자인(Design for debate)
사게 만든다(Makes us buy)생각하게 만든다(Makes us think)

이 표를 볼 때 조심할 점이 있습니다. B가 옳고 A가 틀렸다는 주장으로 읽기 쉽지만, 이 목록은 비교를 통해 디자인의 가능한 범위를 넓혀 보려는 도구에 가깝습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잘 작동하는 문손잡이가 필요하고, 그 일은 A의 영역입니다. 다만 디자인이 할 수 있는 일이 A뿐이라고 여기는 순간, 우리는 어떤 질문은 아예 꺼낼 수 없게 됩니다.

비판에서 추측으로

그렇다면 비판적 디자인과 스페큘러티브 디자인은 어떻게 다를까요. 둘의 경계는 깔끔하지 않고 연구자마다 조금씩 다르게 구분하는데요, 스페큘러티브 디자인을 비판적 디자인의 한 갈래로 보고 그중 미래 제안에 초점을 맞춘 작업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관점이 비슷하지만 시제의 차이를 들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판적 디자인이 ‘지금의 이 물건은 어떤 세계를 전제하고 있는가’를 묻는다면, 스페큘러티브 디자인은 ‘만약 세계가 달라진다면 어떨까’를 묻는다는 것입니다. ‘What if’라는 짧은 말이 이 작업의 문법이 되는 이유입니다.

던과 라비는 이 ‘추측’이 ‘예측’과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맞히는 것을 목표로 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대신 여러 가능성을 눈앞에 꺼내어 어떤 미래를 원하고 원하지 않는지를 함께 토론하게 만들고, 그렇게 현실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바꿀 수 있는 것이며, 바람직한 미래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서 어떤 점들이 개선될 수 있는지를 논의하고자 합니다.

쓸모없음의 쓸모

이렇게 보면 스페큘러티브 디자인의 결과물이 왜 그토록 쓸모없어 보이는지도 이해가 됩니다. 디자인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살 수 없고, 양산되지 않으며, 때로는 불쾌하기까지 합니다. 예술과의 경계도 모호하기 때문에, 그것을 과연 디자인이라 부를 수 있느냐는 비판도 꾸준히 따라다닙니다.

하지만 이것은 디자인의 개념과 본질이 확장되어 오고 있음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되는 시각입니다. 디자인의 본질은 꾸준히 ‘판매’를 벗어나 개념적이고 사변적인 방향으로 발전해왔습니다. 그 가운데 바뀌지 않았던 것은 오로지 ‘목표 지향적’으로 ‘환경과 행동을 기획하고 변화를 유도한다’는 점이었지요.

결국 팔아야 하는 물건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넘어서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시장의 바깥으로 나가야만 ‘사람들이 원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꺼낼 수 있고, 디자인은 그때 비로소 문제를 푸는 도구에서 문제를 다시 쓰는 도구가 됩니다. 즉, ‘판매’조차도 목표에 맞지 않는다면 후순위로 두는, 환경과 행동의 기획과 개선이라는 목표를 최우선으로 하는 디자인의 본성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앞서 간단히 소개했던 ‘미래의 고깔’을 다시 보고자 합니다.

참고한 자료

  • Anthony Dunne, 『Hertzian Tales』 (1999)
  • Anthony Dunne, Fiona Raby, 『Speculative Everything』 (MIT Press, 2013)